다이제
과자 자판기를 바라보다가, 다이제 씬을 함께 먹기로 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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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일에 열중하던 때였습니다. 더워서 창문을 열었지만, 비가 내려 사무실 안은 습기로 가득 찼습니다. 창문을 닫아도 이미 들어온 습기는 사라지지 않았고, 컴퓨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까지 더해지니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어요. 그래도 오랜만에 맡아보는 비 냄새가 조금은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습니다.
오늘따라 모든 것이 어긋나는 날이었어요. 햇빛을 가리려고 일부러 챙이 긴 모자를 샀는데, 막상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요. 퇴근길엔 우산도 챙기지 않았는데, 다행히 동료가 빌려주었어요. 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비가 멈춰버리더군요. 결국 손에는 모자와 우산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사는 건 이런 것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고요. 하루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어요. 더운 것도 즐거웠고, 습기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새로 산 모자는 그냥 가지고 나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산을 빌려준 동료에게 고마웠고, 다음에 돌려주며 나눌 이야기를 떠올리니 그마저도 즐거웠어요. 오늘도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감사했고요.
당신과의 약속도 그렇습니다. 다이제 씬을 사다 주기로 했었지요. 일이 조금 늦어질 수도 있겠지만, 과자 자판기 앞에서 웃고 있는 제 모습까지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작은 약속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변화일까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입니다.
사랑에 한해서, 마음 아픈 일이 어디 있을까요.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무슨 수로 찾겠어요.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 그것마저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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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생 습기를 맞이한 것도, 우연히 다이제를 발견한 것도, 오늘 있었던 일들은 분명 제게 이러한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만약 제가 잘못 이해해서 똥볼을 찬 것이더라도 그것마저 의미가 있겠지요. 운명론처럼.
무슨 오뚜기도 아닌데 오뚝이처럼, 바보처럼 긍정적이게 다시 일어나는 바보는 아닙니다. 만 그렇게 되어있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게 옳은 길이겠죠.